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바스쿠 다 가마 (문단 편집) === 캘리컷을 불지옥으로 만들다 === 이렇게 인도양 초입부터 학살을 시원하게 한바탕 저지른 바스쿠 다 가마 함대는 마침내 캘리컷에 도착하였다. 도착하자마자 인근의 어선들을 때려잡으며 소요를 일으킨 바스쿠 다 가마는 통치자 자모린에게 교역소 습격 사건에 대한 사과, 정당한 보상, 이슬람 상인 추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자모린의 입장에서 이는 말도 안되는 요구였고 당연히 거절할 수 밖에 없었다. 습격사건은 포르투갈과 아랍 상인과의 갈등이 주된 원인이었고 캘리컷 측은 이미 포르투갈의 2차 함대에 습격사건의 복수를 명목으로 미친듯이 포격을 얻어맞고 항구가 초토화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게다가 3차 함대를 이끈 주앙 다 노바 역시 어김없이 자모린과 불화를 일으키고 인도 함선들을 한바탕 약탈한 바가 있었다. 이미 죽은 50명의 10배는 넘는 사람들이 살해당했고 털린 재산도 엄청났다. 거기다 바스쿠 다 가마는 자모린의 어민들을 인질로 잡아 어그로를 더욱 더 끌고 있는 상태였다. 이런 요구에 굴복하면 지배자로서의 자모린의 권위는 개판이 되어 버린다. 자모린은 일단 어민들부터 석방하라고 요구했다. 이에 포르투갈 함대는 정박해 있던 20여척의 아랍 함선들을 나포하고 선원들을 싹 쓸어버렸다. 그리고는 함선마다 포로들을 돛대에 수십명씩 매달아 죽이며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더니 또다시 캘리컷에 무차별 포격을 퍼부어 항구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캘리컷은 화포의 성능이 딸려 제대로 된 반격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포르투갈 측은 기고만장해져서 경악할 만한 패륜행위를 저지르는데, 이것이 바로 전설적인 인육 커리 사건이다. 유럽인 탐험가들이 저지른 패륜과 살육 중에서도 잔혹하기로 손꼽히는 행적이다. 바스쿠 다 가마는 캘리컷을 불바다로 만들기 전 20여척의 아랍 상선들을 나포하면서 800명의 무슬림을 포로로 잡았다. 바스쿠 다 가마는 이 포로들의 팔, 다리, 귀와 코를 잘라낸다. 아마도 교역소에서 죽은 53명의 포르투갈인에 대한 복수로 보인다. 기독교인을 죽인 불신자들에 대한 응징인 것. 여기까지만 해도 참혹한 일인데 바스쿠 다 가마는 이렇게 잘라낸 팔, 다리, 귀, 코를 차곡차곡 보트에 싣고는 협박성의 서신을 브라만인 사절과 함께 자모린에게 보냈다. 서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걸로 커리나 해 먹어라'''' 인육으로 [[커리]]를 해드시라는, 그야말로 경악할만한 패드립이었다. 이후로도 바스쿠 다 가마는 이틀 내내 400발의 포격을 퍼부었다. 대포와 소포를 가리지 않고 쏴대어 캘리컷 시가지를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캘리컷을 박살낸 후 몇몇 선장들은 이쯤 되면 상륙해서 약탈도 한뚝배기 해먹자고 해적스러운 제안을 한다. 하지만 바스쿠 다 가마는 불바다 깽판을 쳐놓고서도 아직 협상의 여지가 있다고 판단했고~~그 짓거리를 해놓고 협상각을 본다고?~~[* 자모린이 포르투갈의 무위에 겁을 집어먹고 쫄았을테니, 협박 좀 하면 포르투갈한테 다 퍼주는 불평등조약에 사인하겠지? 식의 판단으로 추론된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이 계산은 빗나가는데 자모린은 끈질겼고 포르투갈에 쉽게 굴복하지 않았다.] 약탈은 접어둔 후 일단 캘리컷을 6척의 함선으로 봉쇄해놓고 떠나기로 한다. 미리 호 학살과 캘리컷 불바다 만행 이후로 인도의 말라바르 해역 전역이 공포에 떨었다. 인근 항구의 상선들은 모두 숨었고 모든 무역행위가 동결되다시피 했다. 겁을 집어먹은 코친이나 칸나노르, 콜람, 코둔갈루 같은 인도 세력들은 포르투갈의 보호 아래로 들어가기를 희망했고 교역조건을 재협상하거나 배에 향신료를 가득 채워주는 식으로 포르투갈에 굴종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